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융의 최면치료증례

  • 해오름
  • 조회 1792
  • 2009.01.15 17:54
1905년 나는 정신의학의 대학강사로 임명되었고 같은 해에 나는 취리히 대학 정신과의 상급의사가 되었다. 나는 4년간 이 직위에 머물러 있었다. 그리고는 1909년에 일이 너무 많아져서 그만두었다. 해를 거듭할수록 나의 개업이 커져서 대학병원 일을 더 이상 해낼 수가 없었다. 그러나  私講師로서의 활동은 1913년까지 계속했다. 나는 정신병리학, 그리고 물론 프로이드의 정신분석기초와 함께 원시인 심성론을 강의하였다. 이것이 나의 주요 직무였다. 처음 몇 학기 동안 나는 강의에서 무엇보다도 최면술과 쟈네(Janet)와 훌루르노이(Flournoy)의 학설을 다루었다. 뒤에는 프로이드의 정신분석의 문제에 중점을 두게 되었다.

 최면술 강의에서도 나는 학생들에게 소개한 환자의 個人歷을 살펴보곤 하였다. 아직도 내 기억에 생생하게 남아 있는 증례가 있다.

 한 번은 58세쯤 된 중년 부인이 찾아왔는데 종교적 경향을 강하게 가지고 있는 듯했다. 그녀는 지팡이를 짚고 하녀의 부축을 받으며 걷고 있었다. 17년째 그녀는 왼쪽 다리의 疼痛性痲痺를 앓고 있었다. 나는 그녀를 편안한 의자에 앉혀 놓고 그녀의 병력을 물었다. 그녀가 입을 열고 넋두리를 사직하자 그녀의 전 병력이 온갖 우여곡절과 함께 쏟아져 나왔다. 나는 결국 그녀의 말을 중단하고 말하였다. “자, 이제 더 이야기할 시간이 없군요. 지금 내가 당신에게 최면을 걸어야겠습니다.”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그녀는 눈을 감고 깊은 황홀경에 빠졌다, 최면은 걸지도 않은 채 ! 나는 놀랐지만 그대로 두었다. 그녀는 쉴새없이 말하고 특이한 꿈을 이야기했는데 그것은 상당히 심각한 무의식의 경험을 묘사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뜻을 이해한 것은 훨씬 뒷날의 일이다. 당시 나는 그것이 일종의 섬망상태일 것이라 가정했었다. 그러나 내게는 그런 상황이 좀 거북했다. 거기에는 내가 최면술을 보여 주고자 한 학생이 20명이나 있었던 것이다.

 30분 후에 내가 환자를 다시 깨우고자 했을 때 그녀는 깨어나지 않았다. 나는 섬뜩한 느낌을 받았다. 내가 혹시 잠재성 정신병을 건드린 것이나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10분 정도 지나 비로소 그녀를 깨울 수 있었다. 이때 나는 나의 불안을 학생들이 눈치채지 않게 할 필요가 있었다! 부인이 제정신을 차릴 무렵 그녀는 어지럽고 혼란에 빠져 있었다. 나는 그녀를 진정시키고자 하였다. “나는 의사입니다. 괜찮습니다.” 그러자 그녀가 소리쳤다. “그런데 내 병이 나았어요!” 그녀는 지팡이를 내던지고 걸어갈 수 있었다. 나는 얼굴이 상기되어 학생들에게 말했다. “자, 이제 여러분은 최면술의 효력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 경우에 무엇이 진정으로 일어났는지 전혀 짐작이 가지 않았다.

 그것이 나로 하여금 최면술을 포기하도록 만든 경험 중의 하나였다. 나는 도대체 무엇이 일어났는지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 부인은 실제로 치유되었고 기쁜 마음으로 그곳을 떠났던 것이다. 나는 그녀가 자기의 상태를 나에게 다시 전해 주기를 부탁했다. 왜냐하면 늦어도 24시간 안에 재발이 있을 것을 예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통은 되돌아오지 않았고 나는 나의 회의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치유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되었다.

 다음 해 여름학기의 첫 강의 때 그녀가 다시 나타났다. 그녀는 이번에는 바로 얼마 전부터 시작된 심한 背痛을 호소했다. 나는 그것이 내 강의가 다시 시작된 사실과 관련되었을 가능성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마 그녀는 신문에서 내 강의의 공고를 읽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녀에게 언제부터 아프기 시작했는지, 어떻게 아프게 되었는지를 물었다. 그러나 그녀는 무엇이 어느 때 일어났는지 기억하지 못했고 하여간 그것에 대해 아무 설명도 못했다. 그러나 결국 나는 그 동통이 정말로 그녀가 내 강의의 공고를 신문에서 읽은 시간부터 생겨났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것은 내 추측에 들어맞았지만 나는 아직 그 기적적 치유가 어떻게 해서 일어났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또 그때처럼 그녀를 최면에 걸었고 그녀는 역시 그 당시처럼 저절로 황홀상태에 빠졌고 그런 뒤에는 동통이 사라졌다.

 강의가 끝난 뒤 나는 그녀의 생활사를 자세히 알기 위해서 그녀를 붙들고 물어 보았다. 그녀에게는 정신박약을 앓고 있는 아들이 있는데 현재 우리 병원의 내가 맡고 있는 병동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녀가 둘째 남편의 성을 가지고 있는데다 아들은 첫 번째 결혼에서 낳은 아이였기 때문에 나는 이 사실을 몰랐다. 그 아이는 그녀의 외아들이었다. 물론 그녀는 머리 좋고 성공적인 아들이기를 바랐다. 그래서 그 아들이 어린 나이에 병들자 크게 실망했다. 그 당시 나는 아직 젊은 의사로서 그녀가 나를 아들처럼 여길 만한 온갖 속성을 갖추고 있었다. 그리하여 영웅의 어머니가 되고 싶은 그녀의 명예욕이 나를 덮친 것이었다. 그녀는 이를테면 나를 양자로 삼아 그녀의 기적적 치유를 세상의 널리 알려 주었던 것이다.

 사실 나의 마술사로서의 지역적인 명성은 그녀의 덕분이다. 또한 이 이야기가 곧 여기저기서 오고갔으므로 그녀는 나의 첫 개인 환자가 되었다. 나의 정신치료 개업은 한 어머니가 나를 그녀의 정신병에 걸린 아들의 위치에 놓으려는 시도와 함께 시작되었다! 물론 나는 그녀에게 이런 관계를 설명해 주었다. 그리고 그녀는 모든 것을 깊은 이해심으로 받아들였다. 그 뒤에 그녀는 다시는 재발을 하지 않았다.
 그것을 나의 첫 번째 정신치료 경험이었다. 나의 첫 分析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른다. 나는 그녀와의 대화를 분명히 기억하고 있다. 그녀는 지성적인 사람으로 내가 그녀를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그녀와 그녀 아들의 운명에 관심을 보여 준 것을 무척 고맙게 여기고 있었다. 그것이 그녀를 도왔다.

 나의 개인 병원에서도 처음에는 최면술을 이용했지만 나는 곧 그것을 포기했다. 왜냐하면 우리는 최면술로써 암중모색을 하는 격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치료효과가 얼마나 오래 갈지 알 도리가 없다. 나는 늘 불확실한 상태에서 일하는 데 저항을 느끼고 있었다. 또한 환자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내가 결정하는 것을 나는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나에게는 환자가 어디로 자연스럽게 발전해 가게 되는지를 환자 자신으로부터 듣는 것이 훨씬 중요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꿈이나 그 밖의 무의식의 표현을 주의 깊게 분석할 필요가 있었다. 



(융. 회상,꿈 그리고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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