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날마다, 모든 면에서, 점점 더 좋아지고 있다“
- 에밀 꾸에의 ‘자기암시‘중에서
의지와 상상이 싸우면 누가 이길까?
사전을 펼쳐서 ‘의지’라는 단어를 찾아보라. ‘어떤 행동을 자유로이 결정하는 능력’이라고 씌어있다. 우리는 이 정의를 아무 의심 없이 받아들인다. 하지만 우리가 늘 당당히 여기는 의지는 상상에게 항상 자리를 양보한다. 이것은 한 치의 예외도 없는 절대적인 법칙이다.
“에잇, 말도 안 되는 소리 마쇼!”라고 말한다면, “아니오. 이것은 진실입니다.”라고 나는 분명히 말할 것이다.
이런 사실을 믿고 이해하고 싶다면, 한번 주위를 둘러보라. 그리고 당신 눈에 보이는 것을 이해하려고 노력해 보라. 그러면 이내 내가 말한 것이 터무니없는 말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머리가 좀 이상한 사람이 한 말이 아니라, ‘사실’을 있는 그대로 한 말임을 알게 될 것이다.
땅바닥에 폭이 한 삼십 센티미터쯤 되고 길이가 십 미터쯤 되는 널빤지가 놓여 있다고 가정해 보자. 누구나 이 널빤지의 한 쪽 끝에서 다른 쪽까지 쉽사리 걸어갈 수 있음은 확실하다. 이제 실험의 조건을 바꾸어 보자. 널빤지는 이제 높은 빌딩 옥상에서 다른 빌딩의 옥상으로 걸쳐 있다. 감히 누가 이 널빤지에 한 걸음이라도 내 디딜 수 있을까? 당신은 두 걸음도 못 가서 다리가 후들거리고 아무리 ‘의지’의 힘을 다하더라도 종국에는 땅으로 떨어질 것이다.
땅바닥에 있는 널빤지와 공중에 떠 있는 널빤지...이유는 간단하다. 널빤지가 땅바닥에 놓여 있을 때, 당신은 다른 쪽 끝까지 쉽게 갈 수 있다고 '상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공중에 떠있는 널빤지를 보며 당신은 갈 수 없다고 ’상상‘한다. 할 수 없다고 ’상상‘하면, 당신의 ’의지‘는 당신을 앞으로 나아가게 하지 못한다. 절대로 할 수 없다. 하지만 지붕을 고치는 사람이나, 목수 같은 사람들은 이런 공포를 이겨낸다. 이들은 할 수 있다고 생각(상상)하기 때문이다.
현기증은 떨어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일어난다. 그리고 아무리 의지를 다해도 결국 떨어진다. 의지를 더하면 더할수록, 반대되는 결과는 더 빨리 일어난다.
불면으로 고생하는 사람을 생각해 보자. 이 사람이 잠을 자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편히 잠이 들 수 있다. 반대로 잠을 자려고 온갖 의지를 다하면 다할수록 더욱 더 힘들어진다.
잊었던 어느 사람의 이름을 기억해 내려고 애를 쓰면 쓸수록 더욱 더 그 사람의 이름은 모호해진다. 그러다가 “에이, 좀 있다가 생각나겠지.”하고 생각을 고쳐먹으면 문득 아무 노력도 안 했는데 그 이름이 떠오르는 경험들이 다들 있을 것이다.
참을 수 없는 웃음이 터져 고생할 때, 참으면 참을수록 웃음은 더 심하게 터져 나오는 경험들도 모두들 해 보았을 것이다.
이런 각기 다른 상황들 속의 마음들은 어떤 것일까? “넘어지고 싶지 않아, 그런데 넘어질거야”, “잠을 자고 싶어, 그런데 못 잘 거야”, “그 김...김...아무개 씨의 이름이 뭐더라. 아 생각해내지 못할거야.”, “웃음을 멈추고 싶어. 하지만 난 못해”
이처럼 의지와 상상간에 싸움이 일어나면 늘 예외 없이 상상이 승리한다.
원하는 일을 자유롭게 할 수 있도록 해 준다고 믿는 ‘의지’를 우리는 자랑스러워 하지만 사실 우리는 상상의 조종을 받는 꼭두각시에 불과하다. 상상을 다루는 법을 배울 때 비로소 꼭두각시놀음을 멈출 수 있다.
암시와 자기 암시는 어떻게 다른가?
상상은 집안에 갇혀 있는 미친 사람과도 같이 느껴지지만, 실은 길들이지 않은 말과 같다. 이 말에게는 재갈과 고삐가 필요하다. 이런 말에게 시킬 수 있는 것은 그저 제멋대로 돌아다니게 하는 일밖에 다른 방도가 없어 보인다. 그렇게 마구 뛰어 다니다가 종내는 도랑에 쳐 박히게 될 것이다. 하지만 마부가 말에게 재갈을 물리는데 성공만 하면 상황은 달라진다. 이제 말은 제 멋대로 가지 못하고, 마부가 원하는 곳으로 순순히 가게 된다.
우리는 무의식, 혹은 상상이 가지고 잇는 엄청난 힘에 대해 알게 되었다. 이제부터 나는 거스를 수 없어 보이는 이 상상이란 존재를 급류나 말을 길들이듯 제어하는 방법을 보여주고자 하낟. 그 전에 우선 우리가 종종 잘 구분하지 못하는 두 단어를 세심하게 다시 정의해 보자. 두 단어란 ‘암시’와 ‘자기암시’이다.
암시란 무엇일까? ‘누군가에 이에 의해 부여된 생각’쯤으로 정의 할 수도 있겠지만, 과연 이런 작용이 실제로 가능한 것일까? 이런 작용은 필수적으로 ‘자기 암시’로 변환되는 단계 없이는 작동하지도, 할 수도 없다. 정의는 이렇게 바뀌어야 한다. ‘누군가에 의해 누군가에게로 옮겨진 생각’으로.
당신이 누군가에게 암시를 걸 수도 있겠지만, 무의식이 암시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즉 그 암시를 제 것으로 소화하여 자기 암시로 전환하지 않으면 암시는 아무 효과도 발휘하지 못한다. 나 자신도 때로 아주 평범하고 편안한 주제의 암시를 나 자신에게 걸지만 실패하는 경우도 있다. 이유는 무의식적으로 암시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자기암시’를 통한 전환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다.
- 에밀 꾸에의 ‘자기암시‘중에서
의지와 상상이 싸우면 누가 이길까?
사전을 펼쳐서 ‘의지’라는 단어를 찾아보라. ‘어떤 행동을 자유로이 결정하는 능력’이라고 씌어있다. 우리는 이 정의를 아무 의심 없이 받아들인다. 하지만 우리가 늘 당당히 여기는 의지는 상상에게 항상 자리를 양보한다. 이것은 한 치의 예외도 없는 절대적인 법칙이다.
“에잇, 말도 안 되는 소리 마쇼!”라고 말한다면, “아니오. 이것은 진실입니다.”라고 나는 분명히 말할 것이다.
이런 사실을 믿고 이해하고 싶다면, 한번 주위를 둘러보라. 그리고 당신 눈에 보이는 것을 이해하려고 노력해 보라. 그러면 이내 내가 말한 것이 터무니없는 말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머리가 좀 이상한 사람이 한 말이 아니라, ‘사실’을 있는 그대로 한 말임을 알게 될 것이다.
땅바닥에 폭이 한 삼십 센티미터쯤 되고 길이가 십 미터쯤 되는 널빤지가 놓여 있다고 가정해 보자. 누구나 이 널빤지의 한 쪽 끝에서 다른 쪽까지 쉽사리 걸어갈 수 있음은 확실하다. 이제 실험의 조건을 바꾸어 보자. 널빤지는 이제 높은 빌딩 옥상에서 다른 빌딩의 옥상으로 걸쳐 있다. 감히 누가 이 널빤지에 한 걸음이라도 내 디딜 수 있을까? 당신은 두 걸음도 못 가서 다리가 후들거리고 아무리 ‘의지’의 힘을 다하더라도 종국에는 땅으로 떨어질 것이다.
땅바닥에 있는 널빤지와 공중에 떠 있는 널빤지...이유는 간단하다. 널빤지가 땅바닥에 놓여 있을 때, 당신은 다른 쪽 끝까지 쉽게 갈 수 있다고 '상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공중에 떠있는 널빤지를 보며 당신은 갈 수 없다고 ’상상‘한다. 할 수 없다고 ’상상‘하면, 당신의 ’의지‘는 당신을 앞으로 나아가게 하지 못한다. 절대로 할 수 없다. 하지만 지붕을 고치는 사람이나, 목수 같은 사람들은 이런 공포를 이겨낸다. 이들은 할 수 있다고 생각(상상)하기 때문이다.
현기증은 떨어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일어난다. 그리고 아무리 의지를 다해도 결국 떨어진다. 의지를 더하면 더할수록, 반대되는 결과는 더 빨리 일어난다.
불면으로 고생하는 사람을 생각해 보자. 이 사람이 잠을 자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편히 잠이 들 수 있다. 반대로 잠을 자려고 온갖 의지를 다하면 다할수록 더욱 더 힘들어진다.
잊었던 어느 사람의 이름을 기억해 내려고 애를 쓰면 쓸수록 더욱 더 그 사람의 이름은 모호해진다. 그러다가 “에이, 좀 있다가 생각나겠지.”하고 생각을 고쳐먹으면 문득 아무 노력도 안 했는데 그 이름이 떠오르는 경험들이 다들 있을 것이다.
참을 수 없는 웃음이 터져 고생할 때, 참으면 참을수록 웃음은 더 심하게 터져 나오는 경험들도 모두들 해 보았을 것이다.
이런 각기 다른 상황들 속의 마음들은 어떤 것일까? “넘어지고 싶지 않아, 그런데 넘어질거야”, “잠을 자고 싶어, 그런데 못 잘 거야”, “그 김...김...아무개 씨의 이름이 뭐더라. 아 생각해내지 못할거야.”, “웃음을 멈추고 싶어. 하지만 난 못해”
이처럼 의지와 상상간에 싸움이 일어나면 늘 예외 없이 상상이 승리한다.
원하는 일을 자유롭게 할 수 있도록 해 준다고 믿는 ‘의지’를 우리는 자랑스러워 하지만 사실 우리는 상상의 조종을 받는 꼭두각시에 불과하다. 상상을 다루는 법을 배울 때 비로소 꼭두각시놀음을 멈출 수 있다.
암시와 자기 암시는 어떻게 다른가?
상상은 집안에 갇혀 있는 미친 사람과도 같이 느껴지지만, 실은 길들이지 않은 말과 같다. 이 말에게는 재갈과 고삐가 필요하다. 이런 말에게 시킬 수 있는 것은 그저 제멋대로 돌아다니게 하는 일밖에 다른 방도가 없어 보인다. 그렇게 마구 뛰어 다니다가 종내는 도랑에 쳐 박히게 될 것이다. 하지만 마부가 말에게 재갈을 물리는데 성공만 하면 상황은 달라진다. 이제 말은 제 멋대로 가지 못하고, 마부가 원하는 곳으로 순순히 가게 된다.
우리는 무의식, 혹은 상상이 가지고 잇는 엄청난 힘에 대해 알게 되었다. 이제부터 나는 거스를 수 없어 보이는 이 상상이란 존재를 급류나 말을 길들이듯 제어하는 방법을 보여주고자 하낟. 그 전에 우선 우리가 종종 잘 구분하지 못하는 두 단어를 세심하게 다시 정의해 보자. 두 단어란 ‘암시’와 ‘자기암시’이다.
암시란 무엇일까? ‘누군가에 이에 의해 부여된 생각’쯤으로 정의 할 수도 있겠지만, 과연 이런 작용이 실제로 가능한 것일까? 이런 작용은 필수적으로 ‘자기 암시’로 변환되는 단계 없이는 작동하지도, 할 수도 없다. 정의는 이렇게 바뀌어야 한다. ‘누군가에 의해 누군가에게로 옮겨진 생각’으로.
당신이 누군가에게 암시를 걸 수도 있겠지만, 무의식이 암시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즉 그 암시를 제 것으로 소화하여 자기 암시로 전환하지 않으면 암시는 아무 효과도 발휘하지 못한다. 나 자신도 때로 아주 평범하고 편안한 주제의 암시를 나 자신에게 걸지만 실패하는 경우도 있다. 이유는 무의식적으로 암시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자기암시’를 통한 전환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