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정(denial)

  • 해오름
  • 조회 2750
  • 2009.02.02 1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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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부정(denial)

 부정(否定, denial)은 발달단계 중 최초이면서 가장 원초적인 방어기제 중의 하나이다. 의식화된다면 도저히 감당하지 못할 어떤 생각, 욕구, 충동, 현실적 존재를 비의식적으로 부정하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면, 영화를 볼 때 무서운 장면이 나오면 눈을 가리는 여자 아이, 당뇨병 진단이 내려졌는데도 아무렇지 않다고 믿으면서 병원에 가기를 거부하는 환자. 암으로 죽어가면서도 자신은 암이 아니고 의사의 오진이라는 주장하는 환자의 경우를 들 수 있다.

 한 미국인 병사가 월남에서 전사했다. 국무성은 부인에게 유골과 함께 부인의 사진이 든 지갑 등의 유품을 전했다. 수개월 후 부인은 대통령에게 탄원서를 냈다.
 “제 남편은 죽지 않았어요. 뭔가 착오가 일어난 거예요. 그이는 월남의 밀림 속에서 구조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어요. 수색명령을 내려주세요.”
 그녀의 남편은 확실히 전사했었다. 그러나 부인은 이 사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남편의 죽음을 인정한다는 것은 너무나 큰 아픔을 주기 때문이다. 부인은 신문사와 각계에 탄원서를 보냈다. 그러나 돌아오는 회답은 남편의 죽음에 대한 확인뿐이었다. 좌절감 속에서 부인은 냉정한 세상을 원망한다. 밀림 속을 헤매는 처참한 남편의 환상 때문에 부인의 생활은 점점 파괴되어 갔다.

 이 부인은 부정(否定, denial)의 심리 상태에 있다. 감당할 수 없는 현실에 직면했을 때 인간은 이 사실 자체를 부정해 버림으로써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려 한다. 이것이 부정의 심리다.
 필자는 초등학교 시절, 눈이 많이 내린 어느 날 ‘꿩몰이’를 했다. 산을 몇 개나 넘은 꿩은 마침내 지쳐 버렸다. 온몸이 노출된 채로 논두렁의 눈더미 속에 머리를 처박고 있다. 마치 자신이 볼 수 없으면 아무도 자신을 볼 수없는 것처럼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이 꿩처럼 자신이 부정해 버리면 현실 자체도 부정되어 버리는 것처럼 믿는 것이 부정의 심리다.
 암 선고를 받은 환자들이 흔히 보이는 반응이 이것이다.
 “내가 그런 병에 걸릴 리가 없어. X-ray 필름이 다른 환자의 것과 바뀐 거야. 의사의 오진일 거야.”
 환자는 여러 병원을 전전하다가 결국 병이 악화되고, 치료시기를 놓치게 된다.

 당뇨병 환자가 있었다. 공복시 혈당은 100mg/㎗ 정도가 정상인데, 이 환자는 300mg/㎗가 넘었다. 다행히 합병증은 아직 없는 상태였다. 의사는 식이요법과 합병증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지적 수준도 높고 사회적으로도 명사인 이 환자는 도무지 의사의 지시를 따르지 않았다. 오히려 의사의 지시를 무시하는 듯했다. 콜라․ 아이스크림 ․ 설탕을 몽땅 넣은 커피 ․  과자 등을 마구 먹고, 식사도 무절제하게 과량을 섭취했다. 식사 시간마다 부인은 환자에게 해로운 것을 먹지 못하게 하고, 환자는 먹으려 하는 전쟁이 반복되었다. 때로 환자는 폭발적으로 화를 냈다.
 “나를 병자처럼 취급하지 말아요. 나는 아무 이상 없어. 의사의 말대로라면 나는 벌써 장님이 됐든지 간경화가 됐든지 고혈압이 됐을 거야. 피곤은 좀 느끼지만 내가 못하는 일이 뭐가 있어. 나는 내 식으로 산다구.”

 이 환자는 규칙적으로 해야 하는 검진을 회피했다. 약물도 소변검사도 자꾸 잊어 먹는다. 두렵기 때문이다. 자신이 당뇨병 환자라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은 것이다. 이 환자도 부정의 심리상태다. 이런 마음의 상태는 치료의 가장 큰 장애물이다. 현실을 부정하고 회피하는 한 문제의 합리적인 해결은 없다. 고통스럽더라도, 피할 수 없는 것이라면 그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어야 비로소 치료의 문이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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